프랑수아즈 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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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수아즈 지루는 스위스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작가, 정치인이다. 영화 스크립터로 경력을 시작하여, 잡지 엘르의 편집장과 렉스프레스의 공동 창간인으로 활동했다. 1974년 프랑스 최초의 여성 장관인 여성 지위 담당 국무장관을 역임했고,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30편 이상의 영화에서 각본, 조감독, 스크립터로 참여했으며, 30권 이상의 저서를 출간했다. 2003년 사망했으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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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지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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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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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레아 프랑스 구르지 |
출생일 | 1916년 9월 21일 |
출생지 | 스위스, 로잔 |
사망일 | 2003년 1월 19일 |
사망지 | 프랑스, 일드프랑스, 뇌이쉬르센 |
자녀 | 1남 1녀 |
직업 | 언론인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프랑스 민주 연합 |
문화부 장관 | 재임 기간: 1976년 8월 24일 ~ 1977년 3월 30일 대통령: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총리: 레몽 바르 전임: 미셸 기 후임: 미셸 도르나노 |
여성 권리 담당 국무장관 | 재임 기간: 1974년 ~ 1976년 대통령: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총리: 자크 시라크 후임: 모니크 펠티에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마르크 알레그레 장자크 세르뱅슈레베르 |
2. 어린 시절 및 사생활
1916년 9월 21일, 스위스 로잔에서 터키인 아버지 살리프 구르드지(Salih Gourdji)와 그리스 테살로니키 출신 어머니 엘다 플라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살리프는 세파르딕 터키계 유대인이었고, 제네바에 있는 아젠스 텔레그래피크 오토메인의 이사였다.[20] 어머니 엘다는 러시아계 가문 출신이었다.
지루는 이민자 출신 세파르디 터키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제네바의 오토만 텔레그래프 통신사 국장이었던 살리 구르지 알 바그다디였다.[1] 리세 몰리에르와 그로슬레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2] 대학교를 졸업하지는 못했다.[3] 결혼하여 아들 하나(그녀보다 먼저 사망)와 딸 하나를 두었다.[1]
리세 몰리에르와 드 그로슬레이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으나[21], 대학교는 졸업하지 않았다.[22] 결혼 후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20][23]
지루는 장자크 세르방 슈레베르가 사빈 베크 드 푸키에르와 결혼하자 깊은 상처를 받고 두 차례 자살을 시도했으며, 자크 라캉에게 정신분석을 받기도 했다.[16] 또한 이 충격으로 세르방슈레베르에게 반유대주의적인 내용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지루의 전기를 쓴 로르 아들러는 지루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유대계라는 사실을 "절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약속하게 했던 점을 들어, 이를 "그녀 자신의 유대적인 부분의 부정"으로 해석하기도 했다.[15][16]
하지만 지루는 "절대로 꺾이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13] 지루는 자신이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항상 죄송하게 생각"했고, "여자아이도 남자아이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11] 지루의 딸 캐롤린은 2011년에, 어머니는 저널리즘과 페미니즘에서 예외적인 존재였으며, "어머니에게는 가죽 같은 강인함이 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내게는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10]
3. 생애
1932년 마르셀 파뇰의 ''파니''에서 대본 소녀로 마크 알레그레 감독에게서 영화계 활동을 시작했고, 1936년에는 《위대한 환상》 세트장에서 장 르누아르와 함께 일했다. 1946년부터 1953년까지 엘르 잡지의 편집자를 지냈으며, 장 자크 세르방슈레베르와 함께 프랑스 뉴스 잡지 렉스프레스를 창간하여 1971년까지 편집자로, 이후 1974년까지 편집장으로 일했다.
1984년부터 1988년까지 Action Internationale contre la Faim의 사장이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는 영화 관람권 판매 개선을 위한 위원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Le Journal du Dimanch프랑스어의 문학 평론가였고, 198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프랑스어에 주간 칼럼을 기고했다. 파리 아메리카 병원에서 추락으로 인한 머리 부상 치료 중 사망했다.[22]
3. 1. 초기 경력 (영화계, 저널리즘)
지루는 1932년 마르셀 파뇰의 ''파니''를 각색한 마르크 알레그레 감독의 영화에서 스크립트 걸로 영화계 경력을 시작했다.[24] 1936년에는 장 르누아르와 함께 ''위대한 환상'' 세트장에서 일했다.[4] 1927년 부친 사리프가 사망하자, 지루는 학업을 중단하고 타이피스트 자격을 취득한 후, 가계를 돕기 위해 14세 때부터 파리 (라스파유 대로)의 서점에서 일했다. 여기서 마르크 알레그레 감독을 만나, 알레그레의 소개로 짧은 기간 동안 앙드레 지드의 비서를 맡았고, Yves Mirande프랑스어 감독의 『바카라』에서 조감독을 맡았다. 또한 알레그레와 장 르누아르 감독의 영화 『위대한 환상』(1937)에서 프랑스 최초의 여성 스크립터로 활약했다. 이후 자크 베케르 감독의 영화에서 각본을 담당했고, 이때부터 본명인 구르지 대신 프랑수아즈 지루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지루"(Giroud)는 "구르지"(Gourdji)의 아나그램이다).[10]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간지 Paris-Soir프랑스어에 기고하기 시작했고, 점차 저널리즘, 더 나아가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11] 한편, 레지스탕스 운동에도 참가했지만, 1944년에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프렌느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언니 자난(통상 "두스")도 레지스탕스에 참여하여, 프랑수아즈보다 더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1943년에 체포되어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1945년 5월에 간신히 생환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지루는 "두스가 죽은 날, 나의 어린 시절이 사라졌다"라고 회상했다.[11]
이후 시나리오를 쓰고, 결국 30권의 장편 도서(소설 및 논픽션)를 완성했으며 신문 칼럼을 쓰기도 했다.[4] 1946년(창간 직후)부터 1953년까지 엘 잡지의 편집장을 지냈으며, 장 자크 세르방슈레베르와 함께 프랑스 뉴스 잡지 L'Express프랑스어를 창간했다. 1971년까지 L'Express프랑스어의 편집장을 지냈고, 1974년 프랑스 정부에 참여 요청을 받을 때까지 그곳의 편집장을 지냈다.
3. 2. 엘르(Elle) 편집장 (1946-1953)
Hélène Lazareff프랑스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뉴욕으로 망명하여 미국의 잡지사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1945년 『보그』 등 미국의 패션 잡지 스타일을 도입한 잡지 『ELLE』를 창간했다.[12] 1946년 지루를 편집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이 잡지는 "유행"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노숙자 문제, 아베 피에르의 자선 활동, 이혼과 인공 임신 중절 등의 시사 문제도 다루었다. 지루는 여성 독자에게 참정권 행사를 독려하고 취업을 권했으며, 아베 피에르나 작가이자 페미니스트 활동가인 Benoîte Groult프랑스어에게 기고를 요청하는 등, 이 잡지를 통해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지루는 1946년(창간 직후)부터 1953년까지 ''엘'' 잡지의 편집장을 지냈다.[4]
3. 3. 렉스프레스(L'Express) 창간 (1953)
1953년, 프랑수아즈 지루는 엘르를 떠나 당시 연인 관계였던 언론인이자 정치인인 장 자크 세르방슈레베르와 함께 렉스프레스를 창간했다.[13][14] 이는 인도차이나 전쟁의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던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를 지지하기 위한 활동의 일환이었다.[13][14] 이듬해인 1954년에는 세르방슈레베르의 여동생 크리스티안 콜랑주가 합류하여 '마담 렉스프레스'의 편집장이 되었다.
렉스프레스는 창간 당시부터 식민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알제리 전쟁 중 프랑스군의 고문 문제를 다루며, 알제리에서 고문을 받은 여성 교사 레오네 무즐라라의 인터뷰를 게재하기도 했다.[15] 지루는 프랑수아 모리악과 알베르 카뮈에게 기고를 요청하여, 모리악은 500편, 카뮈는 55편의 글을 렉스프레스에 실었다. 장 폴 사르트르, 르 몽드의 정치 부장 피에르 비앙송 퐁테,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편집 주간 장 다니엘 등도 렉스프레스에 기고했다. 1970년 렉스프레스의 발행 부수는 50만 부에 달했다.[11] 지루는 "여성이 여성 잡지 외의 잡지를 경영하거나 공동 경영한 적은 이전까지 없었다"라고 자부했다.[11]
3. 4. 정치 경력 (1974-1977)
1974년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은 지루를 여성 지위 담당 국무장관에 임명했다.[25] 지루는 1974년 7월 16일부터 1976년 8월 27일까지 이 직책을 수행했으며, 이후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5] 그녀는 1977년 3월까지 총 32개월 동안 자크 시라크와 레몽 바르 내각에서 활동했다.[5] 그녀는 급진당 당원이었으며, 선거 문서에는 자신의 직업을 "journaliste"(기자)로 기재했다.[5]
프랑스 내각에 여성의 권리나 지위에 관한 장관이 임명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1974년 프랑스 내각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9%였지만,[10] 1970년대는 여성 해방 운동이 세력을 확장한 시대였다. 시몬 베유도 후생 장관으로 임명되어, "베유 법"으로 불리는 중절 합법화 법안을 국민 의회에 상정했다. 지루는 베유와 함께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했고, "100가지 정책"을 제안했다. 이 중 보건, 교육, 노동 조건, 농업 등에서 여성의 지위, 남성에게 한정되었던 직업에 여성의 진입에 관한 약 30개의 정책이 채택되었다.[10]
1976년 레몽 바르 내각이 성립되자, 지루는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3. 5. 정치 경력 이후
1977년 지방 선거에서 지루는 프랑스 민주 연합에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의 지지를 받아 파리 15구 후보로 출마했다. 그러나 레지스탕스 훈장을 둘러싼 스캔들이 발생했다. 지루는 사망한 언니 자난과 함께 레지스탕스에 참여했고, 훈장을 수여받을 예정이었지만, 실제로는 받으러 가지 않아 공식 목록에 이름이 기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부정하게 레지스탕스 훈장을 받았다고 고발당했다. 결국 지루는 입후보를 철회해야 했고, 의혹이 풀린 것은 2년 후인 1979년이었다.[17]
정계에 환멸을 느낀 지루는 이후 다시 집필에 전념하여, 알마 말러, 마리 퀴리, 예니 마르크스 등 많은 저서를 발표했다. 또한, 파리 마치프랑스어, 르 주르날 뒤 디망슈프랑스어,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프랑스어 등에 기고했으며, 1992년에는 페미나 상 심사위원을 맡았다.
1979년, 베르나르 앙리 레비, 마레크 알테르, 자크 아탈리, 알프레드 카스틀레 등과 함께 기아 구제를 위한 비정부 기구 "액션 아겐스트 헝거"(국제기아대책기구|Action contre la faim프랑스어)를 결성했다.
2003년 1월 19일, 넘어짐이 원인이 되어 옮겨진 아메리칸 호스피탈에서 사망했다. 향년 86세였다. 시신은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 화장된 후, 딸 카롤린이 그 재를 장미 나무에 뿌렸다. 1997년 출판된 아르튀르 또는 살아가는 행복프랑스어에서 지루가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 "내 시신은 화장하여 재를 꽃 거름으로 해 주었으면 한다. 여자의 먼지가 장미를 키운다..."라고 썼기 때문이다.
2003년 1월 19일자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프랑스어에 추도사가 다수 게재되었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지루는 Action Internationale contre la Faim의 사장이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그녀는 영화 관람권 판매 개선을 위한 위원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그녀는 Le Journal du Dimanch프랑스어의 문학 평론가였고, 1983년부터 그녀가 죽을 때까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프랑스어에 주간 칼럼을 기고했다. 그녀는 추락으로 인한 머리 부상을 파리 아메리카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사망했다.[22] 지루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녀는 1984년부터 1988년까지 노벨상 수상 자선 단체인 ACF를 운영했다.[20][26]
지루는 종종 프랑스를 "타락에서 벗어나게" 하는 그녀의 목표를 말했다. 그녀는 미국인들이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틀에 박힌 것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뉴욕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녀는 그곳에서 발견한 "낙관의 정도, 통쾌함"에 충격을 받았다. 그 견해는 그녀에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 "미국에는 유럽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강점이 있다."[27]
80대에, 지루는 프랑스 텔레비전에, 100살까지 살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는 프로그램인 '100 앤스'에 출연했다. 그녀는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 가을부터 얼굴과 손에 붕대를 감은 채 등장했다. 그녀는 장수할 수 있는 식단을 추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녀는 "절임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먹었다."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붕대를 감은 손으로 사과 껍질을 벗기려다가 실패했고, 그럴 수 없게 되자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칭찬하는 몇몇 신문 기사들은 그녀의 반짝이는 유머 감각을 언급했다.
렉스프레스프랑스어는 지루의 죽음에 대한 특집 호를 발행했다. 이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고했다.
:모든 곳의 여성들은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 지루 양은 그들을 매우 지적이고 단호하게 변호했다.[28]
4. 사망
2003년 1월 19일, 넘어짐이 원인이 되어 뇌이쉬르센의 아메리칸 호스피탈(American Hospital of Paris)로 옮겨졌으나 사망하였다. 향년 86세였다.[22] 시신은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 화장된 후, 딸 카롤린이 그 재를 장미 나무에 뿌렸다. 1997년 출판된 『아르튀르 또는 살아가는 행복』에서 지루가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 "내 시신은 화장하여 재를 꽃 거름으로 해 주었으면 한다. 여자의 먼지가 장미를 키운다..."라고 썼기 때문이다.
2003년 1월 19일자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에는 다음과 같은 추도사가 게재되었다.
-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제1서기: "그녀(지루)는 적확하게 조준하고, 명확한 전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표현력은 훌륭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 프랑수아즈 지루는 또한 열정이 있었는데, 그것은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행동을 지지했을 때, 그리고 후에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웠을 때 나타났다. 특히 여성의 권리를 위한 싸움은, 보도에 있어서도 정치적 책무에 있어서도 매우 열심이었다."
-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전 대통령: "그녀는 프랑스 생활의 문을 여성의 역할로 향해 힘껏 열어 보였다."
- 장 다니엘: "그녀에게 인생이란 투쟁이었다."
- 베르나르 앙리 레비: "프랑수아즈는 요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냈다."
5. 유산 및 평가
지루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984년부터 1988년까지 노벨상 수상 단체인 ACF를 관리했다.[1][6]
지루는 프랑스를 "침체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목표를 자주 밝혔다. 그녀는 미국인들이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침체에 빠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뉴욕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녀는 그곳에서 발견한 "낙관주의의 정도, 흥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러한 시각은 그녀에게 남아 있었다. "유럽의 우리들은 미국이 가진 강점을 끊임없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7]
80대에도 지루는 프랑스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100 Ans'' (백 살까지 사는 가능성을 탐구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촬영 직전에 넘어져 얼굴과 손에 붕대를 감은 채 출연했다. 그녀는 장수를 위한 식단을 추천해 달라는 요청에 "다진 스테이크와 샐러드"라고 답했다. 붕대로 감싼 손으로 사과 껍질을 벗기려다 실패했고, 할 수 없게 되자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몇몇 칭찬 기사에서는 그녀의 유쾌한 유머 감각을 언급했다.
L'Express프랑스어는 지루의 죽음에 대한 특별판을 발행했다. 이 기사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 모든 곳의 여성들이 무언가를 잃었다. 지루는 그들을 매우 지적이고 강력하게 옹호했다.[8]
2003년 1월 19일, 넘어짐이 원인이 되어 옮겨진 뇌이쉬르센의 아메리칸 호스피탈에서 사망했다. 향년 86세. 시신은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 화장된 후, 딸 카롤린이 그 재를 장미 나무에 뿌렸다. 1997년 출판된 『아르튀르 또는 살아가는 행복』에서 지루가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 "내 시신은 화장하여 재를 꽃 거름으로 해 주었으면 한다. 여자의 먼지가 장미를 키운다..."라고 썼기 때문이다.
2003년 1월 19일자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에는 다음과 같은 추도사가 게재되었다.
- 당시 사회당 제1서기 프랑수아 올랑드: "그녀(지루)는 적확하게 조준하고, 명확한 전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표현력은 훌륭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 프랑수아즈 지루는 또한 열정이 있었는데, 그것은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행동을 지지했을 때, 그리고 후에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웠을 때 나타났다. 특히 여성의 권리를 위한 싸움은, 보도에 있어서도 정치적 책무에 있어서도 매우 열심이었다."
- 지스카르 데스탱 전 대통령: "그녀는 프랑스 생활의 문을 여성의 역할로 향해 힘껏 열어 보였다."
- 장 다니엘: "그녀에게 인생이란 투쟁이었다."
- 베르나르 앙리 레비: "프랑수아즈는 요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냈다."
6. 저서
프랑수아즈 지루는 소설과 논픽션을 포함하여 30권의 책을 저술했다.[4] 다음은 그녀의 주요 저서 목록이다.
제목 | 출판 연도 | 비고 |
---|---|---|
프랑수아즈 지루가 여러분께 파리의 모든 것을 소개합니다프랑스어 (Françoise Giroud vous présente le Tout-Paris) | 1953 | 마르셀 아샤르 서문 |
새로운 초상프랑스어 (Nouveaux Portraits) | 1954 | |
누벨 바그: 젊음의 초상프랑스어 (La Nouvelle Vague, portraits de la jeunesse) | 1958 | |
I Give You my Word | 1973 | |
권력의 코미디프랑스어 (La Comédie du Pouvoir) | 1977 | |
내가 믿는 것프랑스어 (Ce que je crois) | 1978 | |
좋은 즐거움프랑스어 (Le Bon Plaisir) | 1983 | |
존경할 만한 여성프랑스어 (Une femme honorable) | 1981 | 영어판: Marie Curie: A Life (1986) |
좋은 즐거움프랑스어 (Le Bon Plaisir) | 1984 | 각본 |
Dior | 1987 | 크리스찬 디올 전기 |
알마 말러, 혹은 사랑받는 기술프랑스어 ('Alma Mahler, ou lart dtre aimée) | 1988 | 알마 말러 전기 |
특별 강좌프랑스어 (Leçons particulières) | 1990 | |
마리 퀴리, 존경할 만한 여성프랑스어 (Marie Curie, une Femme honorable) | 1991 | 텔레비전 시리즈 |
제니 마르크스, 혹은 악마의 아내프랑스어 (Jenny Marx ou la Femme du diable) | 1992 | 예니 폰 베스트팔렌 전기, 가브리엘 데스트레 문학상 수상 |
남자와 여자프랑스어 (Les Hommes et les femmes) | 1993 | 베르나르-앙리 레비와 공저 |
어느 파리 여성의 일기프랑스어 ('Le Journal dune Parisienne'') | 1994 | |
세상의 소문: 일기, 1997년과 1998년프랑스어 (La Rumeur du monde: journal, 1997 et 1998) | 1999 | |
우리는 항상 행복할 수 없다: 이야기프랑스어 (On ne peut pas être heureux tout le temps: récit) | 2000 | |
어제 일어났어요: 일기 1999프랑스어 ('Cest arrivé hier: journal 1999'') | 2000 | |
직업 저널리스트: 마르틴 드 라보디와의 대화프랑스어 (Profession journaliste: conversations avec Martine de Rabaudy) | 2001 | |
내일, 벌써: 일기, 2000-2003프랑스어 (Demain, déjà: journal, 2000-2003) | 2003 | |
프랑수아즈 지루가 소개하는 파리의 사교계프랑스어(Françoise Giroud vous présente le Tout-Paris) | 1952 | |
새로운 초상프랑스어(Nouveaux Portraits) | 1953 | |
누벨바그 ― 젊은이들의 초상프랑스어(La Nouvelle Vague, portraits de la jeunesse) | 1958 | |
저널리즘의 모험가프랑스어 | 1970 | 로제 바일랑 전기 수필집 『로제 바일랑 대담집』의 지루에 관한 장 |
만약 내가 거짓말을 한다면프랑스어(Si je mens) | 1972 | |
한 줌의 물프랑스어(Une Poignée d'eau) | 1973 | |
권력의 희극프랑스어(La Comédie du Pouvoir) | 1977 | |
내가 믿는 것프랑스어(Ce que je crois) | 1978 | |
존경받는 여성프랑스어(Une femme honorable) | 1981 | 마리 퀴리 전기 |
좋은 즐거움프랑스어(Le Bon Plaisir) | 1983 | 소설 |
디올 ― 크리스찬 디올 1905-1957프랑스어(Dior, Christian Dior 1905-1957) | 1987 | |
내 말 좀 들어봐: 파리-베를린 왕복프랑스어(Écoutez-moi: Paris-Berlin, aller-retour) | 1988 | 귄터 그라스 공저 |
알마 말러, 혹은 사랑받는 기술프랑스어(Alma Mahler, ou lart dêtre aimée) | 1988 | 알마 말러 전기 |
개인 교수프랑스어(Leçons particulières) | 1990 | |
제니 마르크스, 또는 악마의 아내프랑스어(Jenny Marx ou la Femme du diable) | 1992 | 예니 폰 베스트팔렌 전기 |
어떤 파리지엔의 일기프랑스어(Le Journal d'une Parisienne) | 1994 | |
나의 아주 소중한 사랑프랑스어(Mon très cher amour) | 1994 | |
남자와 여자프랑스어(Les Hommes et les femmes) | 1994 | 베르나르-앙리 레비 공저 |
호랑이의 심장프랑스어(Cœur de tigre) | 1995 | 조르주 클레망소 전기 |
숭고한 여성 코지마프랑스어(Cosima la sublime) | 1996 | 코지마 바그너 전기 |
올해의 암캐: 1995, 어떤 파리지엔의 일기 제2권프랑스어(Chienne dannée : 1995, Journal dune Parisienne vol. 2) | 1996 | |
유쾌하게 기뻐하며: 1996, 어떤 파리지엔의 일기 제3권프랑스어(Gais-z-et-Contents: 1996, Journal d'une Parisienne vol 3) | 1997 | |
아르튀르 또는 살아가는 행복프랑스어(Arthur ou le bonheur de vivre) | 1997 | |
2 더하기 2는 3이다프랑스어(Deux et deux font trois) | 1998 | |
프랑스 여성, 갈리아 여성에서 피임약까지프랑스어(Les Françaises, de la Gauloise à la pilule) | 1999 | |
세상의 소문프랑스어(La Rumeur du monde) | 1999 | |
어제 일어났다. 일기 1999프랑스어(C’est arrivé hier. Journal 1999) | 2000 | |
(거의) 진짜 이야기프랑스어(Histoires (presque) varies) | 2000 | |
저널리스트의 일, 마르틴 드 라보디와의 대담프랑스어(Profession journaliste, conversation avec Martine de Rabaudy) | 2001 | |
항상 행복할 수는 없다프랑스어(On ne peut pas être heureux tout le temps) | 2001 | 자서전 |
루, 자유로운 여성의 이야기프랑스어(Lou, histoire d'une femme libre) | 2002 | |
벌써 내일프랑스어(Demain déjà) | 2003 | |
표범의 반점프랑스어(Les Taches du léopard) | 2003 | |
자유로운 여성의 이야기프랑스어(Histoire d'une femme libre) | 2013 |
7. 영화 각본 등
지루는 1932년 마르크 알레그레 감독이 마르셀 파뇰의 ''파니''를 각색한 작품에서 스크립트 걸로 영화계 활동을 시작했다.[4] 1936년에는 장 르누아르와 함께 ''위대한 환상'' 세트장에서 일했다.[4] 앙드레 지드의 비서로 잠시 일했으며, Yves Mirande|이브 미랑드|프랑스어 감독의 『바카라』에서 조감독을 맡기도 했다.[10]
이후 자크 베케르 감독의 영화에서 각본을 담당했고, 이때부터 본명인 구르지 대신 프랑수아즈 지루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지루"(Giroud)는 "구르지"(Gourdji)의 아나그램이다).[10]
다음은 지루가 참여한 영화 목록이다.
연도 | 제목 | 역할 |
---|---|---|
1935 | {{lang|fr|Baccara|바카라|} | } || 조감독[10]